
그림의 역사는 길지만 그림 감상의 역사는 짧다.
고대 그림은 요즘처럼 감상을 목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주술적이며 생존과 결부되어 있었다. 사회조직이 생기면서 화가는 노동자 계급으로 특별한 목적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러한 그림은 권력을 가진 일부 계층만을 충족시키면 되었기에 당연히 소수를 위한 그림이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화가에게도 자율권이 생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화가들 자신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그림을 그렸다. 당연히 감상자들은 그림을 어렵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그림을 보는 사람도 많아졌다. 예전엔 그림을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림은 소유의 개념이지 공유의 개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림을 모아 놓은 곳이 있었지만 그것은 특권층들의 취미방이었다. 현재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1820년경 왕후 귀족의 콜렉션이 공공물로 환원된 것이다. 물론 이전에는 미술품뿐만 아니라 보물, 책, 과학기구 등 온갖 신기한 물건들을 잡다하게 모았다. 당시에는 그림을 모아 놓는 장소에 그림들로 벽면 가득 메우고, 공간에 맞추어 그림을 자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오늘날같이 흰 벽면에 사람의 눈높이를 기준으로 일렬 수평으로 줄 맞추어 그림을 걸기 시작한 것은 고작 1930년경에 와서의 일이다. 그림 창고가 아닌 불특정 다수를 위한 그림 감상의 공간으로서 화랑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은 바로 이때부터인 것이다.
1651년작인 이 그림은 당시 특권층을 상대로 그림을 거래하던 화랑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주로 루벤즈, 라파엘, 지오르지오네 등 당대 화가를 포함한 르네상스 대가의 그림들이며, 건장한 남자의 5배는 됨직한 높다란 천장 가득 그림이 빼곡이 걸려 있다. 그림들이 참으로 그림들이 질서있게 면을 잘 채우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각 가로줄의 그림들은 모두 같은 높이로 그 폭을 달리 하고 있을 뿐이다. 맨 아랫줄의 인물 초상화의 크기들은 죄다 같은 사이즈다. 그림들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으면 이처럼 정돈되어 보여지기 힘들 것이다. 아마도 당시 화가들은 주문된 그림을 그릴 때 크기까지도 엄격히 규제를 받았던 것 같다.
빼곡한 그림들을 자세히 훑어보면 당시 성행하던 그림풍까지도 읽을 수 있다. 매우 사실적인 기법을 사용했으며 종교화나 인물화가 대부분이다. 그 무렵 서양은 자연보다 인간을 중심에 놓고 세계를 파악했기 때문에 당시 풍경화는 화단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일까? 잘 들여다보면 중심 아래쪽에 단 한 점의 외로운 풍경화가 발견된다.
또 한가지 이색적인 것은 몇몇 그림 액자에 커튼 같은 천이 드리워 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도 당시 그림 보관을 위한 나름대로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한창 흥정 중이니 만큼 모든 그림이 다 공개가 되고 있고 실제로 이 그림들의 대부분이 현재 비엔나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림 한 점을 통해 그 시대의 많은 명작과 또 그를 탄생시킨 시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와도 같이 느껴진다. 그림 속의 화랑은 누구나 가서 그림을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화가는 거래가 될 만한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살 사람만이 이곳에서 그림을 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Gallery라는 같은 용어를 쓰고 있지만 그 분위기와 유행은 지금과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이 한 컷의 그림을 통해 선명하게 읽어 낼 수 있다.
이처럼 그림의 역사는 개념을 달리 하며 변화해 왔고 소수를 위한 그림이 모두에게 공개됨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장벽에 부딪혀 왔다. 교통, 통신, 정보가 극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모든 장르의 예술이 공개되고 감상의 기회가 제공되고 있지만 어쩌면 그 혜택이 부담스러워 도망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현대인들은 이미 모든 속도 싸움에 허덕이고 있고 차라리 장벽을 쌓으며 도망가고 싶어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림 감상이 아닌가 싶다. 감상의 자유는 활짝 열렸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오랜 세월을 견뎌온 그림 한 점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당신을 기다린다. 바로 당신이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다.
그림 같지 않은 그림의 커다란 의미
"나 원, 이건 나도 할 수 있겠다. 이게 무슨 그림이야?" 어쩌다 전시회를 볼 기회가 있다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혼자 되뇌었을 말이다. 현대미술은 그만큼 추상적인 요소가 많아 이를테면 '그림 같지 않은' 그림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한번 뒤집어 생각해 보자. 머리 속에 나름대로의 기준을 설정해 놓고 그와 비슷하면 그림, 그렇지 않으면 그림 같지 않다는 표현을 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기준으로 삼고 있는 그림은 고흐, 고갱, 마티스, 피카소 등등 교과서에 등장하는 화가들의 그림이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남다른 독창성을 생명으로 한다. 그래서 고흐나 고갱을 흉내내서도 안 되고 그들과 비슷해져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러다보니 감상하는 사람들은 '그림 같지 않은 그림'을 볼 기회가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내가 서양화를 전공했다고 하면 "아하, 그럼 파리에 많이 갔었겠네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많은 유럽의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했고 뉴욕은 문화예술 도시로 급성장하여 예술사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50년대 미국은 추상표현주의, 액션 페인팅이라는 미술사조를 내세워 유럽에 대항한다. 인상주의, 입체파, 야수파, 표현주의의 미술사조 계보는 유럽의 색면추상으로 이어졌고, 이때 미국은 그에 맞서 추상표현주의를 내세웠다. 그 대표 주자가 바로 '뿌리기' 기법의 대명사 잭슨 폴록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역사가 기록하는 인물은 그 시대의 성향과 맞닿는다. 1910년 이후 발달해 온 추상화와 표현주의가 맞물린 이 시대의 분위기를 '급성장 중인 미국은.....' 바로 이 작품 한 점으로 대변하고 있다. 화폭을 바닥에 깔고 화폭 위를 종횡무진하며 물감 통을 들고 흩뿌려 대는 그의 작업은 '액션 페이팅'이라는 확실한 명칭까지 얻게 된다. 그의 그림은 단지 화폭에 담아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림과 투쟁하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었기에 미술사에도 한 획을 긋게 된다. 결국 이런 행위에서 모티브가 발전되어 퍼포먼스의 가능성을 열게 된 것. 물감통 들고 마구 뿌려대며 예술이 탄생된다면 누구나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겠다고 빈정댈 수 있겠지만, 그러나 예술 세계에 있어선 독창성 그러니까 가장 먼저 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세 번째 하는 것은 독창성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예술이라 불러주지 않는데 어찌 할까. 플록은 바닥에 깔린 화폭에 물감을 뿌려대며 어쩌면 삐딱한 웃음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질질 흘리며 뿌려진 오색찬란한 물감이 흐느적거리며 세상을 빈정대는 듯하다. 그렇다. 때로는 친절한 충고보다 한 마디의 빈정거림이 오기와 자존심을 발동시킨다. 그의 그림은 오랜 세월 많은 예술하는 이들을 자극하고 창작의 동기를 부추기는 힘을 가져왔던 것이다. 참고 : <<한젬마의 그림이야기>> - http://old.artjemma.com/ 사진같지도 않은 사진의 이해 그리고 감상 제목에서 보는 것 처럼 사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시작하면 어렵고 복잡해진다. 여기서는 그것은 생략하고 싶다. 다만 사진을 공부하는 사람들과 가끔 현대사진을 전시하는 전시장에서 난해한(?) 작품을 대하게 되면 갑자기 그들은 별로 말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게 도대체 뭐야!" 라는 생각은 있다.다만밖으로 드러내고 표현을 못하고 있기에 가만히 있는 것이다. 아니면 "나는 왜 이것을 보고 이해를 못할까?" 정도의 자책도 동반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이해를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통상의 생활사진가들은 기본적으로 순수사진적인 개념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순수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해를 해보자 순수사진이란 공리적 목적을 띠지 않고 자기표현만이 목적인 사진으로 보도 사진이 실용적이고 기록성을 중시한다고 하면 실용성보다는 예술성을 앞세우는 사진이다. 이것은 심상사진(serious photograph)이라고도 하는데 19c에는 회화성을 사진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Salonpicture : 싸롱 사진, Pictorialism : 회화주의)였으나 20c에 들어 사진적 자각이 생기고 보도사진이 발흥하여 거꾸로 회화성은 하나의 금기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회화성은 사진의 밑바닥에 깔려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다가 오늘날 현대 사진에서는 하나의 평면예술로서 회화성은 새로운 사진적 가능성으로 다시 등장한다. 그렇다면 현대사진은 어떤 흐름을 보이는가? 현대사진은 한마디로 개념을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 모호한 경우가 많이 있지만 , 한 가지 분명 한 것은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반영 한다는 것 이다. 다큐멘터리사진이든 순수사진이든 혹은 찍는 사진이든 만드는 사진이든 간에 그 시대의 산물이므로 어떠한 형식 이든 간에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는 작업은 존재 할 수 없는 것 이다. 카메라가 잡아내는 영상은 단지 순간일 뿐이다. 거기에는 과거와 미래의 아주 짧은 시간마져도 중첩됨이없다. 과거나 미래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떨어져 나와 버린 시간 어떠한 연결성이 없이 철저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시간 이러한 시간을 일상성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현대성이라고 부른다.이러한 찰라의 시간은 공간에서의 평면성과 함께 현대성이라는 즉 모더니티를 획득한다. 시간은 파편으로서 조각나고, 모든 장면은 파편으로서 조각나고 모든 존재와 모든인간은 철저하게 개별주체로서 분리된다. 이러한 분리가 곧 개성이다. 이러한 분리에 의하여 고독과, 부조리, 소외의 문제를 야기 시킨다. 장원사회에서는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이 별 의미가 없었다. 누구나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태어날때부터 신분이 정해져 있었고, 일생동안 변함이 없었다. 가족이나., 족보상으로 우리가 무엇인지가 중요했지. 나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한 개인이 자신의 개성과, 노력과, 재주에 의해서 신분의 수직적인 이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화가는 다른 모든 사람의 눈에 그것이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내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라고 주장했다.""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미술을 통하여 나를 드러낼 것이며 어떻게 타인에게로 접근할 것인가? 이것이 그들의 문제였다. 개인적으로는 이말들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사진가는 다른 모든 사람의 눈에 그것이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라고 주장한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사진을 통하여 나를 드러낼 것이며 어떻게 타인에게로 접근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어떤 시대에 어떤 문화가 형성된다는 것은 몇 명의 천재나, 선각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양식 , 주변의 환경에 의하여 문화는 형성되고 진행되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아방가르드라는 거창한 용어와, 계몽주의를 높이 쳐들고 , 마치, 문화나 역사가 초인이라 불리는 선각자에 의해 이끌어가는 것처럼 생각해왔다. 그래서 새로운 이즘이 나오면 그것을 앞서기위해 또 새로운 이즘이라는 것에 몰두했다. 이제 100여년이 훨씬넘는 모더니즘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 그 동안 미술이 쌓아온 업적이 무엇이며, 과연 역사란 진화인가? 라는 물음에도 회의를 던지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못알고 착각에 빠져 온 것이 아닌가 반성하기도 한다. 우리는 진정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내일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알고져한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에서 "우리는 누구인가"의 물음으로 바꾸어야할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이라도 좀 더 진지한 작업을 하려면 깊이 있는 공부를 하여 사진에 대한시각을 넓혀 나갈 필요가 있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사진의 위상은 해마다 높아져 가고 있지만 한국사진은 아직까지 사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의 부족으로 인하여 사진의 위상은 다른 장르에 비교 할 바가 못 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사진의 모든 주체들이 서로 협력하여 사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 할 때이다 |